흔히들 인간선언과 맥아더와 천황의 사진으로 일본 국민들의 천황에 대한 외경심이 와장창 깨졌다고 말하는데, 반쯤은 맞은 말입니다.

다만 외경심이 압도적인 존경심으로 대체되었지만요.

(일뽕들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 사진. 9월 27일날 찍힌 사진입니다)

그 존경심의 기원은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참을 수 없는 참고,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며" 라는 문장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인것은 이유가 있지요.

전전(戰前) 의 천황은 유럽식의 국민들에게 폭넒게 존경받는 군주라고 보기에는 좀 다른,?아른거리는 그 무언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 존재는 외경심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겠지요.

천황은 영미 프로파간다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짜로 종교적으로 숭배받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정말 신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지만, 실제로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존 톨랜드의 '패배를 껴안고' 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던걸로 기억합니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유교권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가능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책에서 나올것 같은 전통적인 동양적 군주를 생각하면 편할 듯 합니다. 아이고 폐하하면서 머리박고 무릎꿇고 기어가서 영접하는....? 그러나 이것이 군주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나타내긴 하지만 실제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대상은 아니지요.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조금 힘들 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런 천황은 옥음 방송에 의해 일본 국민들에게 직접적인?등장을 알렸습니다.

옥음 방송의 내용은 다른 국가의 항복 선언문과 별 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잘해줬다. 그런데 상황이 안좋다. 그래서 항복했다. 이제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앞으로 견디자." 그런 내용이었죠

그러나 간과할 수 있는 점은 천황이 첫 등장에서부터?엄청나게 고통을 주는 전쟁을 '성단(聖斷)'을 통해 끝내기로 결정하는 자세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천황이 직접?'일본을 구하기 위해?전쟁을 끝내기로 친히 결정을 내린'?방송을 했다는 점은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어떤 국민들에게는 "우리가 부족해서 천황폐하가 이런 방송을 하셨다..." 라는 황송한 마음을 주기도 했고요.

(옥음방송을 청취하는 일본인들. 다만 전후에 찍힌 옥음방송 청취 사진들은 압도적으로 신문사 기자들에 의해 의도된 사진들이 많다. 상식적으로 천황이 항복하는데 사진이나 찍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까?)

이후 천황의 행보와 GHQ와 일본 군부 잔당들의 놀라운 합작은 천황의 이미지를 평화주의자 군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GHQ가 왜 천황을 죽이지 않았지? 라는 말이 많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GHQ는 천황을 전범 재판에 내세울 생각도, 죽일 생각이?아예?없었습니다. 원활한 일본 통치를 위한 미군정의 판단이었죠. 물론 호주에서는 천황을 전범으로 세우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지만 무시당했습니다.?

천황을 전범재판의 마수(?)에서 지키기 위해 일본 군부와 입을 맞춘 이야기는 여기에 다 적기 힘들정도로 너무나도 많습니다. 거기에는 도조 히데키의 말실수나 고노에 후미마로의 자살 등을 비롯하여 GHQ의 추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정치적 공작들이 섞여 있습니다.?

(천황 수호의 1등 공신 GHQ의 건물)

자 그럼, 가장 유명한 일본과 GHQ의 합작품인 전후 일본 순행을 보면서 어떻게 천황이 일본인들에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그 기원입니다. 천황 순행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는 불분명하지만?존 다우어는 그 시작을 가쿠슈인(대충 일본 귀족 전용 학교같은 곳) 원장이었던 야마나시 가쓰노신이?레지널드 블라이스를 천황에게 소개하면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레지널드 블라이스는 영국인 박사였는데, 그가 일본과 연을 맺게 된건 1926년 경성 제국 대학에서 교직을 맞게된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일본어가 매우 유창했던 그는 영국인 아내와 이혼하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심지어 사세구까지 남길 정도로 일본 문화에 조예가 깊었는데,?패전 이후 그는 '가쿠슈인' 교사 자리를 얻게 되면서 황궁과 GHQ의 가교 역할을 맡게 됩니다.?

(레지날드 블라이스. Reginald H. Blyth)?

블라이스는 GHQ와 일본 보수파들 사이에서 진행된 순행 계획, 즉, '종교적 색채를 제거한 민주적 천황' 을 만드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월 13일 그가 작성한 문서가 천황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문서는?"천황은 군림해야지 지배하면 안된다." "국민들에게 정말로 관심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이는 조칙만으로는 안되며, 스스로 언행을 통해 국민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일깨워 줘야한다" 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즉, 천황은 "오르간 소리같은 굳은 음색이 아니라 인간의 음성" 으로 일본인들과 만나며

광산도 방문하고 농촌을 순회하며 그들에게 말을 건네며 질문도 해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그들에게 가능성이 있으며 세계에 평화적 방법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야한다는 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궁정관리들은 기겁했고 공산당원들이 천황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지만

의외로 천황은 블라이스의 제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맥아더 또한 천황순행 계획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순행은 쇼와천황 이미지 체인지 작업의 장대한 공작 중 하나입니다. 1기 순행과 2기 순행이 있는데요. 1기 순행은 1948년 이전이고, 2기 순행은 1949년 이후의 순행으로 정의됩니다.

근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천황은 패전하기전에는 일본 시찰?안해봄?"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후 순행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비교해볼까요??

1945년 도쿄 대공습 후 도쿄를 시찰하는 히로히토 천황?

패전 후 히로히토 천황의 순행장면 사진

차이를 아시겠나요?

천황의 일본 순행은 인간 선언으로 시작된 상징 천황제로서의 천황을 만들기 위한 공작이라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 사진으로 우리는 전전의 행차와 전후의 순행이 어떤 모습으로 일본 국민에게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전(戰前)의 행차가 국민이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일천만승의 옥체로서 황공하옵게도 순행하시는" 하는 모습이었다면

전후의 순행은 오직 충격과 공포의 국민과 직접 인사하는 천황이 다가오는 순행입니다.

천황의 전후 순행을 중점으로?다룬 국내 논문인 [ 전후순행과?상징천황제 :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p.19,21)?손안나, 건국대학교2010?] 에서??언급되는 당시 일반국민들의 반응들입니다.?

이것이 1차의 단계였습니다. '충격'.

이전까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천황을 직접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멍하게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 있지만 눈을 떼지를 못하는 군요.?어떤 사람은 합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전근대적인 위치의 동양 군주가 하늘같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신민들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인거죠

(변화된 천황의 위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사진. 패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1편에서 말한 것처럼 천황이 일본 국민들에게 직접 나타나면서 준 인상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계속되면서 상징천황제의 프로파간다를 주입시키는 매스컴과 함께, 천황의 인상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천황은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절모를 손에 쥐고 촌장들에게 농사가 잘되냐고 묻고, 수해를 인해 농사가 힘든 모습을 보고 고생이 많다고 말하며, 자기에게 말을 걸줄 상상도 못한 어떤 여성 농부에게 식량 증진을 위해 힘내주라고 부탁하면서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전쟁 이후 파괴된 생활을 둘러보며 격려하는 모습도 흔했지요.

매스컴은 이런 천황의 모습에 부채질을 가했습니다. 연이어 신문들에서는 천황의 말 하나하나를 주워 섬기며 자애로운 평화주의자 천황의 모습을 선전했고

천황이 불편한 기차에서 주무셨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천황께서는 심지어 "전쟁의 잔해를 생각하면 열흘동안 목욕을 하지 않아도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다." 라고 감동적인 말씀을 하셨다고?쓰고,?천황께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따셨다 등등, 친근한 모습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충격은 점차 열광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천황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조차 일반 대중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엉거주춤 움직이고 뻣뻣한 콧수염에 두꺼운 뿔테안경, 옷은 너저분하고 구두는 닳아 있는 모습, 이런 모습조차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천황에게 미안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폐하가 황송하옵게도 우리들에 가까이 내려와 이런 행동을 하게 됐는가? 이건 분명 일본이 잘 노력하지 않아 패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더더 모여 천황을 보려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에는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투고문들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천황의 순행에 대해 광기어릴 정도로 팬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테면 지나간 자리의 조약돌을 주워간다던지, 목욕물을 주전자에 채워서 가져가는 사람 등등.... (우웩)?

천황이 가부키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부둥겨안는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읽고 일본인들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천황이 터널 공법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는 모습이 실린 신문에서 일본인들은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생물학자였기도 했고요.)

천황이 스포츠 행사에 참여했다는 기사에서?일본인들은 문화적 재건을 노력하는 천황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천황이 히로시마의 폐허의 아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세계 평화에 공헌해야한다는 연설을 보며 일본인들과 심지어 히로시마 사람들조차 천황의 평화주의적 인물상을 느꼈습니다.

상징 천황제로서 순행은 명명백백하게 언론의 선전과 함께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GHQ에서는 통제를 벗어난 열광을 경계했고, 1948년 전면 중단하면서, 신문 언론도 일제히 입을 다물게 되었죠.?

하지만 순행이 중지된 기간에서는 '뒷 이야기' 들이 쏟아져 나오며 천황의 이미지 구축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일화를 봅시다.

천황과 잡담을 나누고 맞담까지 피고.....

천황과 여러가지 주제로 대화로 나누고 나서 "지고로 높은 천황폐하가 너무나도 겸손하시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인터뷰들은 자애로운 천황 이미지상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 도쿄 전범재판이 끝났습니다. 이제 천황은 전범으로서 처형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난 것이지요.?천황의 순행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특히 재판 이후에는 GHQ의 언론 검열도 느슨해지면서, 천황에 대한 열렬한 찬양 논조의 기사에도 눈을 감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패전 전과 달리 천황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기사들)

그러나 2기 순행은 1기 순행과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민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과일을 따는 모습은 여전히 볼 수 있었지만, 2기 순행에서는 1기 순행에서 볼 수 없었던?국가주의의 모습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패전 직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천황이 해상자위대 관함식에 참여하고 이세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대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알리는 등, 1기 순행 때 철저히 민중과 맞춰져 있었던 천황이 모습이 살짝 붕 뜨기 시작하며,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한 내셔널리즘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천황은 이미 본질적으로 일본국 신헌법에 의해 규정된 정권이 전혀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갇혔습니다. 따라서 2기 순행의 전략적 목적은 전후 일본식 내셔널리즘의 재인식이 섞여 있는 상징 천황제 이념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천황은 전전의 압도하는 군주가 아니지만, 일본의 국민들을 통합하는 존재로써 동시에 일본 헌법 체제에서 최대한 민중과?다른?고고한 모습을 연출하는 상징적인 천황의 모습을 구축하면서, 전후부터 시작된 장대한 상징천황제 조직을 끝맺음하는 역할이 2기 순행의 목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GHQ의 전전 천황 이미지 세탁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했던 논문인?쇼와천황(昭和天皇)의 전후순행과?상징천황제 : 언론보도를 중심으로(손안나, 건국대학교, 2010) ?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